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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6.25 참전용사 진재봉 어르신이 들려주는 생생한 전쟁이야기 (1)

최현향 기자 | 기사입력 2011/07/27 [17:00]

[인터뷰] 6.25 참전용사 진재봉 어르신이 들려주는 생생한 전쟁이야기 (1)

최현향 기자 | 입력 : 2011/07/27 [17:00]
(뉴스쉐어=대구경북본부) 어느 따사로운 여름날. 대구 지방보훈청, 이미자 복지사와 함께 대구시 동구 평범한 가정집 2층을 찾았다. 이곳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누구보다 바른 길을 걸어 오신 6.25 참전 용사가 살고 있다.

5평 남짓한 방문 사이로 인자한 미소로 자식같이 손녀 딸을 맞이하듯 반갑게 맞아주신 진재봉 어르신.

6.25 참전용사 진재봉 어르신의 집은 기대와는 달리 소박했다. 어르신을 통해 전해 들은 생생한 6.25 전쟁이야기와 어르신의 사랑이야기는 마치 한편의 전쟁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는 기자의 말에 어르신은 “기자 앞에서 시험을 보게 되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으시곤, “옛날에 참 어렵게 살았다. 그치만 내가 참 똑똑했어”라는 말씀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셨다.

진재봉 어르신은 일제치하 일본인들로부터 갖은 모욕을 받아가며 일본에서 학교를 나오셨다. 그때 그 시절, 일본 땅에서는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한국인도 자신의 재능과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다.

학교 졸업 후,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으로 건너오신 어르신. 군대도 없을 시절 하사관 학교 모집 광고를 보시고는 군대를 가야겠다고 결심하셨다.

일본에 살 적에, 일본으로 부터 일본군에 입대하라는 수차례의 강요가 있었지만, 어르신을 아껴주시던 일본인 선생님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일본군으로 입대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때는 남의 나라 일본을 위해 싸울 이유도 필요도 없었지만 어르신은 “이제는 조국을 위해서 헌신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하사관 지원을 하셨다.

당시에는 키가 작아 군대에 못 갈뻔 했지만, 20살의 “할 수 있다”는 열정으로 하사관으로 군입대 하셨고, 마산, 청주를 거처 영주에서 군 생활을 하셨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 부대에 울리는 비상나팔소리와 출동명령 소리가 훈련인줄만 알았지만, 이날 새벽 4시 ‘인민군의 총 공격’으로 6.25 전쟁 났다.

그 날 오후 3시, 어르신은 의정부 전선으로 출동하게 되었는데, 어르신에게는 평소 아끼는 축음기가 있었다. 출동하면서도 “이제는 이 축음기를 못보겠구나”하는 아쉬움이 드셨다고 한다.

▲ 6.25 참전용사 진재봉 어르신     © 최현향 기자

어르신이 의정부 전선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날은 밝은 상태였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군 부대를 보시고는 인민군이 총 공격을 했으니 “이제 죽는구나. 이제는 마지막 죽음이다”하고 생각하셨단다. 이때 어르신의 나이가 24살 이였다.

이때 피난민들은 급한 마음에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피란을 가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초반에 연습용 포와 포탄 밖에 없어 아무런 소용도 없이 이것만 쏘아 대다 나중에는 포만 끌고 다녔다. 싸울 무기도 없어 기관총과 박격포, 밀려오는 중무장한 탱크를 당해 낼 재간은 없었지만 탱크를 그냥 통과 시킬것이 아니라 폭파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탱크를 파괴하기 위한 결사대, 병사 특공대를 모집했다.

이때 ‘대한민국이 완전히 서지 않은 상태였지만, 내 조국을 찾았으니 조국을 위해 죽는 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죽음’이란 생각과 ‘이제는 내나라 내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내 주십시오” 하며 자원을 했고, 공병에 휘발유를 담고 심지를 말아 넣어 불을 붙인 후 햇지를 열고 그 안에 집어 넣었고, 탱크의 바퀴속으로 밀어 넣었다.

중무장한 탱크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M1 소총으로는 상대 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희생된 병사들의 나이는 대부분 20살, 21살이였다.

이렇게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UN군의 협조를 받아 창동을 거쳐 미아리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때, “서울을 지키라”는 특명에 탱크부대가 서울로 진입하지 못하게 막았고, 이렇게 서울을 지켜냈다고 생각했지만 탱크부대는 태릉으로 돌아 서울로 들어왔다.

6월 28일 새벽,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날, 서울을 빠져 나갈 수 있을까 하여 한강으로 정찰을 나갔지만, 이미 한강 다리는 끊어져 있었다. 그런데 피란가던 민간인들은 한강다리가 끊어진 줄도 모르고 차를 그 다리로 곧장 달려 그래도 한강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서빙고로 가서 나룻배를 이용해 서울을 빠져 나오려 했지만, 이곳의 상황도 순탄치는 않았다. 나룻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기 위해 몰려든 피란민들은 “나 좀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앞을 다투어 배에 올랐고, “민간인은 죽지 않는다. 군인은 빨리 건너가 싸워야 하니 먼저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양보해 달라”는 군인들의 말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존재 여부를 놓고 갈림길에 선 상황에서 밀리고 있던 전쟁의 총격전에서 다시 총 공격을 할 수 있었던 계기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였다. 이때 어려운 사태에 맥아더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에 일본으로의 피란을 권했다는 낭설도 있었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의 총공격으로 3.8선까지 밀고 올라 갈 수 있었다. 이때, 3.8선을 통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장군은 설전을 벌이다가 10월 1일 오후 2시 3.8선을 통과 하였고, 총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총를 쏘았다. 바로 3.8선을 돌파한 이날을 기념한 것이 ‘국군의 날’이라 한다.

이렇게 한국군은 압록강까지 진입하였지만, 중공군의 출현으로 더 이상의 공격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후퇴작전을 하게 되었다.

어르신은 평북 덕천에서 중공군과 처음으로 부딪히게 되었다. 중공군은 피리, 나팔, 북을 이용해 심리전을 펼쳤다. 적막감 흐르는 고요한 밤, 중공군은 갑자기 나타나 피리와 나팔을 불고 북을 쳐 댔다.

10월 24일, 달이 몹시 밝은 날 밤. 개울은 벌써 얼음이 얼어 있었다. 개울을 따라 후퇴하던 어르신의 부대가 중공군에 발각이 되었고, 당시 소대장으로 있던 어르신을 향해 중공군은 “저기있다. 지휘관이 저기 있다. 빨리! 빨리!”라고 외쳐댔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에 방망이 수류탄을 맞은 것 이다. 따끔하는 느낌과 함께 온 몸은 피범벅이 되었고, 이제 정말 끝이다는 생각에 어르신은 “하나님 받아 주십시오”하고 엎드렸다. 이를 발견한 소대원들은 얼른 후퇴라는 어르신의 말씀에도 “절대 안 된다”며 어르신을 부축하고 나섰다. 

중공군에 또 다시 발각 될까하여 어르신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하는 수 없이 개울을 통해서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바로 위에는 중공군이 있었기에 수양버들 아래로 몸을 숨기고, 물소리도 내지 못한 채 어디로, 언제까지 가야 할 지도 모르고 강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몸의 감각마저 사라져 아픈것도 모르고 마치 죽것과 같은 느낌이셨다고 한다. 

다행이도 강물이 얼어 다리의 부상 부위도 함께 얼었고, 그 덕에 피가 멈추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기자는 “그 날 만일 강물이 얼어 있지 않았다면 어르신은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악을쓰며 강을 따라 내려가 1대대를 만났고, 보급차에 제일 꼭대기에 쌀가마와 같이 실려 이곳을 빠져 나오셨다. 이때 살 수 있는 방법은 응급차를 타고 야전병원으로 가는 것 밖에 없었다.

응급차를 타고 골제만 있는 평양의 한 대학병원으로 갔다. 이 응급차는 2층칸으로 되어 아래층 2사람, 윗층 2사람 총 4명이 탈 수 있었다. 응급차를 타고가는데 어르신의 배가 점점 뜨거워져 오고 있었다. 이때 어르신은 “자신의 몸이 좋지 않나”하고 생각했지만, 이는 어르신의 윗칸에 타고 있던 사람의 피가 어르신의 배로 끊임없이 흘려 내리고 있었고, 결국은 응급차 안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을꺼란 기대와는 달리 모든 사람들을 제대로 손 쓸 수 없는 상황에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모두 서울로 가야한다. 여기있면 죽는다”는 방송과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대동강역에 집결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더 이상 이곳에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였기에 걸을 수 없는 사람도 옆의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가야만 했다. 

급박한 상황에 주위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기는 힘들었고, 어르신은 아픈 다리를 이끌고 기어서 갔는지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대동강역으로 가서 열차를 탔다.

이곳에는 이미 많은 피란민들과 군인들이 몰려 있었고 어르신도 이들과 함께 무개열차에 올랐지만, 한번도 치료를 받지 못해, 다리의 살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북에서 건너와 도립병원으로 오게 되었지만 이미 환자들로 꽉차 병실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이때, 밀려오는 부상병을 감당할 길이 없어 어르신과 같은 부상을 당한 병사들은 살릴 수 있음에도 불과하고 팔과 다리를 절단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모습이였다.

어르신은 이곳에서 치료가 불가능 했기에 울산의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8개월정도 치료를 받았다. 이때 어르신을 처음 치료해 준 사람이 ‘한소위’다. 한소위는 “아...이러게 맞았구나... 이렇게 맞았구나...”라는 말을 연신 되내이며 안타까워하였고, 어르신의 썩은 다리 살을 도려내고 눈에 보이는 부분의 파편들을 제거해 주었다.

그런데 아직도 어르신의 다리에는 4개의 파편이 박혀 있다고 한다. 그때, 몸속 깊은 곳 까지는 파편을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젊었을때는 몰랐는데, 이때의 부상으로 어르신은 조금만 움직여도 허리가 아프다고 하신다. 생활하는데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죽어간 전우도 있지만 나는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계신다.

육군 병원에서의 치료 후 전선에 다시 들어 갈 수 있는지 여부를 평가 하는데, 어르신은 최전방보다는 제2전선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 어르신은 중위에서 대위로 진급을 하셨고, 물욕이 없는 어르신을 본 대대장이 “마음이 착하다”며 군수물자 취급을 맞기셨고, 이렇게 청렴하게 군 생활을 하시다 소령으로 전역하셨다.

▲ 진재봉 어르신과 이미자 복지사(좌), 이정가 보훈도우미(우)     ©최현향 기자

그 누구보다 더 청렴한 군생활을 해 오신 전재봉 어르신은 현재 가족들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 보내고 혼자 살고 계신다. 미국으로 이민가서 살자는 부인과 자식들의 성화에 “우리나라를 떠날 수 없다”며 가족들을 미국으로 떠나 보내고 대한민국 우리 땅에서 홀로 살고 계신다.

6.25 전쟁때 찍은 사진이 있으면 보여달라는 기자의 말에, “가족들이 이민을 가면서 사진도 모두 미국으로 가지고 가 버렸다”며 지나온 추억을 회상하며 아쉬워 하셨다. 한 평생 살아온 삶과, 우리네 역사마저 미국으로 떠나보낸 것이다.

전재봉 어르신은 “혼자 있으니 모든게 아쉽다” 말씀 하시면서도 “보훈청과 친절한 보훈도우미가 있어(이정자, 여) 보훈청을 의지하며 살고 계신다”며, “얼마전에는 보훈청에서 도배도 새로 해 주고 생일잔치도 열어 주었다”며 환하게 미소 지으셨다.

전재봉 어르신과 보훈도우미는 작은 부분이라도 서로를 칭찬하기에 바빳고, 정말 친딸, 한 가족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서로를 진정으로 아껴주는 모습이였다.

작년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어르신은 이제는 완전히 건강도 회복하시고 보훈청에서 보내주신 안마기 덕분에도 잘 살고 계신다고 한다.

또한, 물욕이 없으신 어르신은 무더운 여름날 동내 뛰어 노는 어린아이들 손에 친 손자, 손녀처럼 아이스림도 하나씩 쥐어 주시고, 아랫집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 홀로 키우고 계신 칠순이 넘은 할머니를 위해 모아둔 파지와 동사무소에서 받은 쌀 등을 아낌없이 나눠 주고 계신다.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당한 억울한 사연들 끝에 찾아온 조국, 진정 우리나라를 알아야 우리나라를 사랑할 수 있다”는 진재봉 어르신의 말씀. 

기자는 어르신의 한 말씀 한 말씀에서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진정 우리 대한민국을 가슴으로 몸으로 지켜오신 6.25 참전용사 진재봉 어르신과 같은 분이 있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세계속에서 우뚝 설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구경북본부 = 최현향 기자 joyfulhy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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