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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다시 울려 퍼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모든 이의 마음 울려

오현미 수습기자 | 기사입력 2017/05/22 [08:00]

[르포] 다시 울려 퍼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모든 이의 마음 울려

오현미 수습기자 | 입력 : 2017/05/22 [08:00]
▲ 광주시 민주광장(구 전남도청) 시계탑에서 매일 오후 5시 18분이 되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온다.     © 오현미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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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쉐어=오현미 수습기자]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매일 오후 518분이 되면 광주 민주광장(구 전남도청) 시계탑에서 이 노래가 울려퍼진다. 5·18전야제가 열리는 지난 17일 오후에도 어김없이 흘러나왔다.
 
이 시계탑은 시계탑은 알고 있다는 기사가 나간 후 신군부가 1980년 대 중반 한밤중에 시계탑을 농성광장으로 옮겨져 20135월까지 그곳에 있었다. 시계탑이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민들이 20151월에 이곳으로 옮겼다.
 
정부가 지난 9년간 공식 기념식 제창을 배제함으로써 5·18 정신이 담긴 곡을 부인하고 억압했다. 이 김일성이고 새날은 북한 주도로 적화통일되는 날이라는 일부 극우보수단체의 주장 때문에 진실이 왜곡되기도 했다.
 
다시 제창으로 불려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가사를 걸으면서 읽는 사람들, 길거리 한쪽에 자리를 잡고 삼삼오오 모여 흥얼거리는 모습이 눈에 띈다.
 

▲ 5·18전야제에 5·18유가족들이 맨 앞에 그 뒤로 윤장현 광주시장과 장휘국 광주시교육감, 그리고 많은 정치인사들, 시민들이 하나가 되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행진했다.     © 오현미 수습기자


5·18전야제는 5·18유가족을 맨 앞에 그 뒤로 윤장현 광주시장과 장휘국 광주시교육감, 그리고 많은 정치인사들, 시민들이 하나가 되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행진으로 시작됐다.
 
전야제 장소인 민주광장(구 전남도청)에는 많은 시민들이 유가족들을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부르며 맞이했다.
 
김순자(82, )씨는 매년 이날이 오면 먹먹한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그런데 올해는 다른 어느 해보다 진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유가족들의 마음과 함께 해 주는 것 같다. 이 행진곡이 제창되는 것을 같이 기뻐해주고, 그날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 주는 것에 감사할 마음뿐이다고 벅찬 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올해 5·18전야제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 오카니라 연주, 국악 등 여러 모습으로 불려졌다.
 
사회자가 오늘은 어떠한 노래보다 이 임을 위한 행진곡100번 넘게 불러도 우리는 이 노래가 지겹지 않을 것이여, 오늘이 이 노래 부르는데 제일 좋은 날이여라 하자 시민들이 함성을 질렀다.
 
사회자가 10대부터 한 명씩 무대에 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도록 했다.
 

▲ 10대를 대표해 늘봄학교 조희숙 학생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무대에서 불렀다.     © 오현미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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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대표해 노래를 부른 조희숙(, 늘봄학교)학생은 무대에 올라 난생 임을 위한 행진곡을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불렀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려고 하는 모습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함께 부른 이 노래는 제가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돌아가신 분들에게 감사하며 유가족분들에게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이 잊지 않고 있다는 것에 위로를 느끼셨으면 좋겠다 고 쑥스러워하며 옆에 있는 친구들과 손잡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록 10대에서 끝나고 본 전야제 행사로 들어가자 많은 시민들이 아쉬워했다.
 
5·18민주평화기념관(구 전남도청)에 도슨트를 담당하고 있는 김현숙(55, )씨는 그때 내 나이 18살이었다. 그날을 뚜렷이 기억한다. 수업을 끝내주며 담임 선생님은 곧장 집으로 가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여러분들이 사진 속에서나 봤던 50대 청년들이 팬티 바람으로 아지랑이가 이글거리는 시멘트 바닥에 벌을 받다가 군화에 밟혀 나중에 차에 실려 떠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봤다. 10일 동안 방송되는 것들이 귀에 아직도 쩔렁쩔렁하게 들려온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살아남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이 도슨트 일을 하게 됐다. 그 당시 상황을 사람들에게 사실을 진실을 정확하게 전달할려고 노력하지만 지금도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며 눈에는 벌써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리고 김 씨는 그 당시 진실이 왜곡된 것을 37년 동안 바로 잡아가고 있는데 지금도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것을 볼 때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이 노래가 끊쳐지지 않고 부르는 동안 진실이 온전히 알려지는 세상이 올 것이다고 강조했다.
 

▲ 5·18전야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고 있다.     © 오현미 수습기자


1982
1임을 위한 행진곡'5·18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고() 윤상원 열사와 그의 야학 동료교사였던 고() 박기순 열사의 영혼 결혼식에서 불려져 처음 공개됐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옥중 장편시를 바탕으로 작가 황석영이 가사를 쓰고 윤 열사의 전남대 후배인 김종률이 곡을 썼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후 5·18민주화운동의 상징적 노래로 자리 잡으며 현재까지 민주화운동 및 노동운동 현장에서 널리 불려오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19805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광역시(당시 광주시)와 전라남도 지역의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 운동이다. 군사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진행된 이 운동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있어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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