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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불모지 조선 땅에 몸 바친 ‘언더우드’ 선교사

분열, 갈등의 한국교회 그의 정신 되돌아봐야

조귀숙 기자 | 기사입력 2016/11/15 [18:54]

복음 불모지 조선 땅에 몸 바친 ‘언더우드’ 선교사

분열, 갈등의 한국교회 그의 정신 되돌아봐야
조귀숙 기자 | 입력 : 2016/11/15 [18:54]
▲ 선교사 '언더우드' <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귀숙 기자

[뉴스쉐어=조귀숙 기자]1885년 복음의 불모지였던 조선 땅에 목숨을 걸고 찾아온 언더우드 선교사. 그가 조선 땅을 밟은 지 130여 년이 지났다. 그의 일생은 조선을 위해 불태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의 근대화 발전에 기여했으며 암울했던 조선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지금의 한국교회.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정신을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지난달 서거 100주년을 맞은 그의 업적을 정리해봤다.

 

◇ 언더우드 선교사, 오지의 땅 조선으로 오다
언더우드는 1884년 조선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선정됐다. 당시 조선은 개화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혼란했다. 때문에 일본에 머무르면서 마가복음서를 번역한 문서선교사인 이수정(李樹廷)에게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조선에서의 개신교 선교를 준비했다.

 

그리고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는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부산을 거쳐 인천 제물포 항에 입항했다. 알렌 선교사의 제중원에서 의사로 사역하면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 조선 최초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 설립 등 조선 근대화에 기여
그는 1887년 조선에서의 첫 장로교 교회인 정동교회(현재 새문안교회)를 설립했고, 1900년도 초에는 개신교 양평동교회를 설립했다.

 

같은 해 언더우드 선교사는 순 한글판인 ‘그리스도신문’도 창간했다. 신문에는 여러 서구문물을 다루는 정보 및 지식도 담겨있어 조선을 근대화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또 오선지 악보를 이용한 첫 찬양가를 간행했으며 성서번역위원회와 한국 최초의 기독교 서적 출판사인 ‘조선셩교서회’도 설립했다. 

 

그의 사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학교 설립이다. 입국 후 1년만인 1886년 한국 최초의 고아학교인 경신학당을 개설, 그곳에서 김규식과 안창호 등의 인물을 길러냈다. 또 기독청년회인 YMCA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그는 조선어 문법책을 영어로 집필했으며 성서 번역 위원회 초대 위원장, 대한기독교서회 회장, 한국 기독교 교육회 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예수교학당, 서울 구세학당,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를 설립했다.

 

◇ 모든 인생 조선에 바친 언더우드, 죽어서도 한국사랑
자신의 모든 인생을 조선이라는 오지의 땅에 바친 언더우드는 건강악화로 1916년 귀국했지만, 그해 10월 12일 조선 선교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한 채 미국 애틀랜틱시티에서 운명했다.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됐다. 사후에도 언더우드 가문은 조선에 남아 3대에 걸쳐서 의료 선교와 한남대학교의 설립으로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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