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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를 아시나요?”

‘왼팔은 조국 위해 다른 한 팔은 문맹자 위해 바치다’

서정현 기자 | 기사입력 2018/03/01 [15:28]

“광주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를 아시나요?”

‘왼팔은 조국 위해 다른 한 팔은 문맹자 위해 바치다’
서정현 기자 | 입력 : 2018/03/01 [15:28]

[뉴스쉐어=서정현 기자] 얼마 전 우리나라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지난날 일제에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에 항쟁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전 국민이 그렇게 대한민국을 외치면 우리 선수들을 응원할 수 있었을까

 
지금으로부터 99년 전인 191931. 민족대표 33인은 파고다공원에서 우리 민족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선언했고 이를 기점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순차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항일독립운동인 만세운동이 확산됐다.
 
선조들의 그날의 그 헌신과 외침들 속에는 전라도 광주에 윤형숙열사도 있었다. 그날을 기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삶을 재조명해본다.
 

▲ 윤형숙 열사 (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     ©서정현 기자

 

전국적으로 확산된 3·1 만세운동이 1919310일 광주 시장통에서도 일어났다. 이곳에 광주 수피아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인 윤형숙열사가 있었다.
 
이날 윤 열사는 당시 광주읍 청사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고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후 만세를 부르며 운동을 진행하던 중 일본 헌병에 의해 눈 깜짝할 사이 그녀의 왼팔이 잘려 나갔다.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성한 팔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녀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본 헌병의 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일본 경찰은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너를 조종한 배후는 누구냐?”의 물음에 나는 보다시피 피를 흘리는 윤혈녀다"라고 대답을 하면서 그녀의 또 다른 이름 윤혈녀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후 윤형숙 열사는 징역 4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는 동안 오른쪽 눈의 시력까지 잃어야 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도 4년 동안 격리 수용되는 고난도 겪었다.
 
이후 윤 열사는 독신으로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뒤 전주로 내려가 기독교학교의 사감과, 고창의 유치원 등지에서 자라나는 어린이 교육에 힘썼다.
 
그녀는 왼팔은 조국을 위해 바쳤고 나머지 한 팔은 문맹자를 위해 바친다는 신념으로 불구의 몸을 이끌고 조국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윤 열사에게 닥친 비극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해방된 조국, 좌우 이념의 갈등 속에서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1950928일 밤, 서울이 수복되자 퇴각에 나선 인민군에 의해 그녀는 학살당하고 말았다.
 
그때 윤 열사 나이 50.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독립을 외치다 잃은 왼팔과 실명된 눈을 평생 끌어안고 어린이 교육에 힘써온 윤 열사의 삶은 사후 63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그 가치를 평가를 받게 돼 정부는 200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 했다.
 
3.1절을 맞이한 우리에게 윤 열사는 묘비에서 왜적에게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하여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됐으나 남북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며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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