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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 낳은 대륙의 불꽃’ 여성독립운동가 박차정

대한 독립을 위해 총을 들다

박지인 기자 | 기사입력 2019/06/02 [22:28]

‘부산이 낳은 대륙의 불꽃’ 여성독립운동가 박차정

대한 독립을 위해 총을 들다
박지인 기자 | 입력 : 2019/06/02 [22:28]

▲ 박차정 의사. [제공=SBS뉴스 캡쳐]    

 

[뉴스쉐어=박지인 기자] 치마 대신 군복을 입고 총을 들었던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가 순국 75주기를 맞아 재조명되고 있다.

 

1910년 5월 8일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태어난 박차정 의사는 1995년 여성 독립운동가로서는 유관순 열사에 이어 두 번째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이후 2006년 5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을 만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열정적인 독립투쟁은 집안의 영향을 받았다.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난 박차정은 신간회와 의열단에 속해있던 오빠 박문희와 박문호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그녀는 근우회 활동을 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근우회는 1927년 우리나라 최초로 전국 규모 여성운동 조직으로 설립됐으며 1928년 5월 19일 동래지회가 창립됐다. 박차정 의사는 1929년 7월 30일 근우회 동래지회 중앙 집행 위원회에서 중앙 상무위원으로 선임, 근우회 동래지회와 도연합회 규칙 세칙 제정 위원으로 선정되는 등 근우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30년 경성 제2차 만세 운동을 지도해 구속된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풀려난 뒤 중국에서 의열단 활동을 하던 둘째 오빠 박문호를 따라 중국으로 망명해 의열단에 합류한다.

 

1932년 10월에는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거처를 옮기며 의열단의 단장이었던 남편 김원봉과 함께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를 설립했으며 이때부터는 박차정 대신 ‘임철애’라는 가명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38년 10월에는 독립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의 부녀복무단의 단장을 맡아 활동을 했으며  1939년 2월 일어난 강서성 곤륜산 전투 중 부상을 당하게 된다. 부상 후유증을 앓던 박차정 의사는 1944년 5월 27일 3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박차정 의사의 유해는 남편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에 안정돼 있다.

 

이러한 박차정 의사의 공로를 기리며 부산지방보훈청에서는 매년 꾸준히 추모식을 개최하고 있으며 그녀를 부산 지역 독립유공자 중 한 명으로 선정해 기념우표와 엽서를 발행하기도 했다.

 

또한 경상남도의회 기획행정위원회는 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박차정 의사 묘소 정비를 위한 예산 1000만 원을 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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